실사구시(實事求是)! “실제의 일[實事]에서 옳음[是]을 구하다.” 달리 말하면, 진리와 실천의 기준을 실사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란 이후 나라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는데 그것을 ‘실사구시’라는 키워드로 꿸 수 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어떻게 사문난적으로 몰렸을까? 그는 40세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줄곧 수락산 석천동에서 기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사서(四書)와 서경·시경의 주해를 쓰고, 노자·장자의 주해서도 썼다. 주희의 권위에 갇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결정적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74세의 그가 쓴 ‘이경석 신도비’였다.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병자호란 때 부득이 항복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비문을 쓴 인물이다. 그의 신도비를 쓰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박세당은 신도비에서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이라 칭하고, 봉황으로 비유했다. 한편 그 노성인을 업신여긴 이를 들고 올빼미로 비유했는데, 바로 송시열을 가리킨 것이었다. 송시열(李景奭, 1607~1689)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그의 문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신도비로는 명분이 약했다. 공격 구실을 아직 발간도 되지 않은 박세당의 〈사변록〉에서 찾았다. 주희의 해석을 벗어난 흉서란 것이었다.
박세당은 이경석을 비판하는 송시열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정치적으로도 입장이 달랐다. 가령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론보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던 주화론을 더 평가했다. 예송 논쟁에 대해서도 “그 마음씀이 험하고 위태롭도다”고 비판했다. 서로 종통(宗統)을 명분으로 삼지만, “상대를 공격하려고 일부러 빌린 주장이요, 상대를 밀어내려고 일부러 빌린 이름”이라는 것이다.
박세당은 문(文)이나 명(名)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질(質)과 실(實)을 중요시했다. 그는 교조적 이론, 공허한 논쟁, 관념적 명분론을 싫어했다. 대신 경세와 민생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농서 〈색경(穡經)〉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공부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사문난적이란 낙인은 당시 공허한 명분론자들이 사상적 협량을 자백한 것이요, 박세당처럼 실사(實事)에서 옳음을 구한 진정한 사상가에게 주는 훈장이었다.
□ 글쓴이 : 김 태 희 (다산연구소 소장) |